- 왕기가 서려있다는 인왕산 자락의 서촌지역!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다.
경복궁 서쪽 마을을 일컫는 서촌(西村). 고관대작부터 중인, 아전까지 서로 다른 신분층이 모여 살던 인왕산 자락 동네다. 사대부 중심의 북촌, 중인 중심의 남촌과는 다른 독특한 생활문화를 형성한 서촌은 조선시대 경치, 문학, 그림 일번지였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최근 발간한 2010 생활문화자료조사집 『서촌-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에서 소개한 서촌의 내력을 정리했다.
서촌은 오늘날의 사직동, 체부동, 필운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효자동, 신교동, 창성동, 통인동, 통의동, 청운동, 부암동 등에 해당한다. 서촌의 역사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시작된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주산은 백악이다. 백악의 우백호인 서쪽 인왕산은 높고 우람해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는 논의도 있었다.
차천로(1556~1615)는 『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 “무학이 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옛날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을 향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무학이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라고 적었다.
전설처럼 민중 사이에 오래도록 전해온 인왕산 왕기설은 임진왜란 이후 다시 퍼졌다. 광해군 대에 인왕산 기슭에 경희궁과 인경궁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실제로 이 부근에서 살았던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됐다.
세종이나 영조의 탄생지도 서촌이다. 인왕산은 경치도 좋고 경복궁에서도 가까운 주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그런데 명승지임에 비해 이름난 정자는 많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임금이 사는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447년 4월 20일 밤 안평대군(1418~53)이 복사꽃이 우거진 낙원에 다녀오는 꿈을 꾸고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려 바친 것이 일본 덴리대 소장 ‘몽유도원도’다. 안평대군은 그림이 완성된 지 3년 뒤인 1450년 설날 ‘몽유도원도’라는 제첨(題簽)을 쓰고 시를 지었다.
이듬해 꿈에서 본 무릉도원과 비슷한 풍경을 인왕산 기슭에서 발견해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었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에 당대의 문인 학자들을 초청해 경치를 즐기며 시를 지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며 아뢴 죄목 중 첫 번째가 그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인왕산이 왕기가 서린 곳인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라 왕권 탈취의 의도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 외에도 김종서, 이개,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 당대 최고 문신 21명이 친필로 글을 썼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이들의 운명은 둘로 갈라졌다. 신숙주, 정인지 등은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에 오르고, 안평대군과 김종서는 목숨을 잃었다. 성삼문, 이개, 박팽년 등 사육신은 3년 뒤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다 실패해 역적으로 처형당했다. 부암동에는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어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 터임을 나타내고 있다. 안평대군의 옛 살림집 근처에 있었던 ‘기린교’로 추정되는 돌다리가 지금은 철거된 옥인동 옥인아파트 9동 옆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문인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18세기 조선의 독자적인 진경산수화풍을 창출한 인물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웃대(서촌)를 그린 그림은 60대 이후 체득한 완숙한 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라 예술성이 뛰어나다. 인왕산 주봉 전체를 화폭에 옮긴 그림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강희언(1738~84 이전)의 ‘인왕산도’가 있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인 1751년(영조 27)에 그린 노년기 역작이다. 사실적인 재현에 기초하면서도 내면의 심상을 투영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가령 백옥색을 띤 인왕산 바위는 검은 먹색으로 반전시켜 장중한 무게감을 줬다. 인왕산 기슭에 폭포를 두 군데 그린 것도 특징이다. 실제로 인왕산에는 멀리서 보일 정도의 폭포는 없다. 청풍계 계곡과 수성동 쪽으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를 원경인 그림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강희언의 ‘인왕산도’는 객관적인 시각에 충실한 그림이다. 인왕산 골짜기를 자세히 파악해 가옥과 지형의 특징을 표현했고, 도성의 성벽과 능선도 빠뜨리지 않았다. 강희언은 특이하게도 여느 산수화에서는 여백으로 남겨두는 하늘을 수채화처럼 채색했다. 하늘의 기상을 관측하는 관상감 관원이었던 그는 하늘도 그려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1752~1800)는 서촌 지역에 자주 행차했다. 사당인 육상궁(증조모), 선희궁(할머니), 연우궁(할머니)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참배를 마치면 선희궁 옆에 있던 세심대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했다. 세심대는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열양세시기』에 “(세심대는) 꽃나무가 많아 봄의 꽃구경이 장관이다. 영조, 정조, 순조, 익종이 여기에 자주 거동하고 한 달 동안 사람들이 구름같이 구경했다”고 적혀 있다.
세심대는 원래 당진현감을 지낸 이정민(1556~1638)의 집터였으나 도성에서 경치 좋기로 유명해 광해군이 세심대를 취하고 대신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정민은 이를 피해 홍주 봉서산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정조는 세손 시절 ‘국도팔영(國都八詠)’을 지었는데, 인왕산에 자주 오르던 때라 주변 명승을 많이 꼽았다. 8곳의 명승 중 필운대, 청풍계, 반송지, 세검정 등 인왕산 자락 서촌의 명승지 네 곳이 포함됐다.
20세기가 된 뒤에도 서촌은 예술의 중심지였다. 이중섭, 이상범, 박노수 등 당대 최고의 화가와 노천명, 윤동주, 이상 같은 당대 최고의 문인이 이곳에 살았다. 이상(1910~37)은 3세 되던 1912년 형편이 넉넉하던 백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상은 백부의 집인 통인동 154번지에 23세까지 살았다. 짧았던 생애 대부분을 보낸 곳이지만 통인동이 작품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경성의 모던보이로 유곽이나 카페에 대한 글을 썼던 그에게 전형적인 주택가인 서촌이 작품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집은 백부가 세상을 떠난 1933년 팔린 뒤 헐려 자취가 없어졌다. 그러나 2007년 문화유산 보전 단체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사들여 이상 기념관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윤동주(1917~45)가 서촌으로 이사온 까닭은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식사가 부실해져서다. 그는 졸업반이던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누상동 하숙집에 살면서 ‘십자가’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등의 작품을 지었다. 윤동주의 하숙집은 10년 전 헐렸고 그 자리에 3층짜리 다가구주택이 들어서 있다.
사적 제149호로 지정된 ‘육상궁과 칠궁’은 조선조 500여 년간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 7명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고종 19년(1882) 불타버린 것을 이듬해 복구했다. 순종 1년(1908년) 이후 여러 곳에 분산돼 있던 여러 신위를 옮겨와 결국 칠궁이 됐다. 저경궁(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신궁), 대빈궁(숙종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신궁), 연호궁(영조 후궁이며 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 신궁), 선희궁(영조 후궁이며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 신궁), 경우궁(정조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신궁), 덕안궁(고종 후궁이며 영친왕 생모인 순헌황귀비 신궁)이 모셔져 있다.
등록문화재 93호인 배화여고 생활관은 당초 선교사를 위해 주택으로 지어졌다. 1915년 무렵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맨 아래층이 반지하로 되어 있어 현관으로 들어서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전체적인 외관은 서양식 붉은 벽돌벽과 서양식 기둥을 사용했지만, 한옥의 기와지붕을 올려 서양식과 한국식 건축이 섞여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문화재자료 9호로 지정된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 집터는 ‘필운대(弼雲臺)’라는 바위 글씨로 남아 있다. 배화여자 중 고교 교사 별관 뒤편 높은 암벽의 왼쪽에 세로로 새겨진 글씨다. 이항복의 글씨라고도 하고, 그 후손인 이유원(1814~88)의 글씨라 전하기도 한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로 서산(西山), 즉 인왕산을 뜻한다.
그 밖에 동양화가 이상범 가옥(등록문화재 171호), 박노수 가옥(문화재자료 1호), 홍종문 가옥(서울시 민속자료 29호), 해공 신익희 가옥(시도기념물 23호) 등 문화재자료가 서촌에 남아 있다. 박노수 가옥의 경우 일제시대 대표적 친일파인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 한국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이 1930년대 후반 설계했다. 조선 말기 한옥 양식과 중국식, 서양식 수법이 섞여 있는 절충식 가옥이다.(※대부분의 글은 『서촌』(서울역사박물관) 자료집에 실린 허경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의 논고 ‘문학작품에 나타난 서촌의 모습’에서 발췌·요약했다. 인왕제색도 관련 글은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논고 ‘한양 웃대의 명승 명소와 진경산수화’에서 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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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사무실 너무 멋질 것 같습니다. ^^
한옥 잘 꾸며 놓으니 참 멋집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삶의 질을 더 따지는 세상이라 앞으로도 관심 받을듯해요
그럴것 같습니다. 고층의 아파트 보다 불편은 하지만
사람사는 멋이 있다고 합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멋지네요..!! ㅎ
잘 보구 갑니다..^^
감사합니다.
좋게 봐 주셔서...
즐거운 시간되세요
저쪽 지역들도 한옥을 철거하고 현대식건물을 짓는 일이 얼마전까지 비일비재했다고 하는데, 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면 이제 앞으로 그런걱정은 안하고 잘 보존될 수 있겠군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럴것 같습니다. 서울시내를 돌아보면 거의가 아파트입니다.
전통한옥은 거의 없지요
즐거운 시간되세요
한옥..그렇게 남아있으니.. 참 묘한 느낌이더라구요..^^
예, 도시 구조물 속에 한옥 찾기가 쉽지 않은데
예쁜 한옥을 보면 포근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경복궁 서촌 한옥마을 대단하군요^^
역시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인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한창 발전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켜 봐 주세요
어디 땅값 올랐다는 얘기만 들으면 배가 아프다는...ㅎㅎ
그렇지요. 못 가진사람들은 땅 값오르는 것이
좋은 현상은 아니겠지요....
골고루 잘 살면 좋을텐데...
즐거운 시간되세요
아, 갑자기 저도 한옥 카페 같은 거 해보고 싶네요...;;;
경복궁 서쪽의 서촌지역과 북쪽의 북촌지역에는 한옥 카페가 많이 있습니다.
한번 둘러 보시고 생각해 보세요
즐거운 시간되세요
이곳에..사무실도 전통가옥에 들어간 경우들이 있어서 몇번 가봤었는데..평단가 오를만 하더군요^^
너무 오르는 것 같아 겁납니다.
투자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즐거운 시간되세요
얼마전 뉴스에서 한옥형 아파트내부를 보고...참부러웠어요...
좀 아파트가 넓어야 좋겠지만...
보면서 참 저랬으면 ..했는데....
갈수록 한옥에 대한 관심은 높아진다지만....실거주지가 아닌 별장...재테크용이 되기도 한다니 좀 아쉽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한옥을 많이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예,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되세요
오호 ㅎㅎ 이런 분위기도 상당히 좋을것 같아요 ^^
서울지역 대부분은 아파트이거나 빌라 등 콘크리트 일색입니다. 한옥이 거의 없지요...앞으로 기대가 됩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빽빽한 아파트 보다 한옥이 많아진다는 점은 좋은데 벌써 그리 가격이 오르면... ㅠㅠ
그런데 북촌지역은 평당 땅 값이 4천만원에서 1억까지 간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서촌지역은 아직까지 투자해 볼만 합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뜨헉... 정말 비싼 동네로군요.ㅠ ㅠ
비싸죠...평당 3천만원이면....
우리네들은 구경만 해야지요...
즐거운 시간되세요
요새 한옥 열풍 장난아닙니다 ㄷㄷ
그런 것 같습니다.
서울에 한옥이 많지 않으니 그런가 봅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