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세에 요절한 이상은 2천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1910년 9월 14일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사로 일하기도 한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이상의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경복궁 서쪽 통인동에서 보냈다. 고작 26년여를 살면서(1937년 4월 17일 사망) 2천여편의 작품을 썼다. 요즘 부각되고 있는 경복궁 서쪽마을과 함께 이상에 대해서 알아본다.
1. 이상은 일생의 대부분을 경복궁 서쪽 인왕산자락에서 보냈다. |
이상은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으며 말을 못할 정도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 서쪽 통인동에 살고 있던 큰아버지댁에 양자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없는 누상동 신명학교(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지금의 조계사 자리에 있었던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동숭동 서울대 자리에 있었던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다녔다.
이상의 어린 시절은 양자라는 특별한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듯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큰어머니는 재취였고 동생들은 재취인 큰어머니가 데리고 온 자식이었다. 어찌 보면 서로 남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산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이상은 통인동 큰아버지댁의 햇빛 한줌 없는 퀴퀴한 골방에서 두문불출할 때가 많았고 그래서 주변사람들에게는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얀 청년으로 알려 지기도 했다.
2. 이상의 직장생활과 작품 활동 |
지금의 서울대 공대의 전신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이상은 졸업 후 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사로 취직을 했으나 몇 년 안 되어 그만두고 지인과 함께 종로 2가에 제비다방을 차렸다가 돈만 날린 후 아픈 몸을 이끌고 시골로가 요양을 하다 부인 변동림과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혼자서 동경으로 떠난다. 동경생활은 비참했다.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희망이 없었다. 동경시내를 배회하다 경찰에 잡혀 감방생활을 하기도 한다. 결국 폐병이 도져 사망하게 되고 아내 변동림이 유해를 거두어 미아리에 안장을 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 알 길이 없다. 천재작가 이상의 일생은 이렇게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천재작가 이상은 당대의 엘리트였으나 건강문제로 건축가로 살지 못했으며 연이은 사업실패로 돈도 벌지 못한 가운데 자신의 작품 2천여편에서 고른 30여편의 시조차 절반밖에 신문에 연재하지 못하여 또 한번의 좌절을 겪는다.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상의 ‘날개’는 우미관 근방 골목 안 일각 대문집에 방방이 수십 가구가 사는 집에서 지인과 각자 방을 얻어 독립된 생활을 하는데 이것이 ‘날개’의 소재가 되는 기둥서방의 생활이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집안 하나 건사하지 못했으며 그리고 남들과 다른 문학을 추구하여 ‘악플’을 잔뜩 받고 뒤로 물러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어찌 보면 이상은 해안을 가진 천재적인 선각자였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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