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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기념물 31호「수성동 계곡」에 전통 수목을 심고 사모정이 들어선다.

  서울은 항상 그 자리에 있지만 서울을 채우는 풍경들은 서서히 바뀌었다. 굴곡 많은 현대사 풍랑속에 제 모습을 잃은 도심 속 유적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인왕산 자락의 수성동 계곡도 제 모습을 잃은 도심 속 유적이었지만 현재 그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기억과 기록에만 남아 있던 이 사물들이 서울시의 노력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옛 모습 찾기가 아니라 선조들의 자부심과 혼을 살려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세워지는 것이다.

1. 수성동 계곡의 역사성과 그간 이용실태

  종로구 옥인동 179-1일대 인왕산 기슭의 계곡물소리가 유명하다고 하여 조선시대부터 수성동(水聲洞, 10,097㎡)으로 불리며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었고 겸재 정선의 수성동 회화에도 등장하며 안평대군의 집(비해당)이 있던 곳으로 당시 경관이 오늘날에도 일부 유지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일 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의 시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 둥 많은 시가 전하며 조선 후기에는 박윤목 등 중인층을 중심으로 저명한 시사(詩社)가 결성되는 등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문학이 사회저변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만든 조선후기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1971년 9개 동 308가구의 옥인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며 회색 콘크리트로 덮어 유명한 물소리를 들을 수 없는 무성동으로 변해 버렸다. 수성동계곡 아래에 있으며 그간 기린교(麒麟橋)로 알려졌으나 기린교로 단정할 증거를 찾지 못한 돌다리는 겸재의 그림에 등장하는 데다 사대문안에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 보존된 통돌다리지만 다리 윗부분을 시멘트로 포장해 주민들의 통행에 이용하였다.

2. 수성동 계곡의 복원계획과 그간 추진현황

  서울시는 인왕산 수성동 계곡이 조선후기 화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진경산수화에 그려져 있는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다는 계획을 갖고 1971년 수성동 계곡에 들어선 옥인시범아파트 9개동 308가구를 960억원을 들여 매입하였으며 2010년 10월 인왕산길 아래 계곡 상류에서 하류 복개도로에 이르는 폭 18m, 길이 190m의 계곡일대와 옥인아파트 옆에 있는 폭 90cm, 길이 3.8m의 돌다리 등 이 지역 10,097.2㎡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하였다.

  현재 아파트 8개동과 단지내 설치된 아스팔트도로 200m(폭 8m), 일부 계곡을 덮은 콘크리트와 시멘트를 철거해 원래의 지형이 대부분 드러난 상태에서 큰 돌로 물길 주변을 단장하고 있다. 내년 5월까지 인왕산 자락을 포함한 1만 7,007㎡에 소나무 등 전통 수목을 심고 계곡부에는 사각의 전통정자 형식인 사모정을 만들며 계곡 중간 중간에 징검다리와 목교가 설치되면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 서울 성곽길과 함께 경복궁 서쪽지역의 대표적 역사경관명소로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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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기가 서려있다는 인왕산 자락의 서촌지역!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다.

  경복궁 서쪽 마을을 일컫는 서촌(西村). 고관대작부터 중인, 아전까지 서로 다른 신분층이 모여 살던 인왕산 자락 동네다. 사대부 중심의 북촌, 중인 중심의 남촌과는 다른 독특한 생활문화를 형성한 서촌은 조선시대 경치, 문학, 그림 일번지였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최근 발간한 2010 생활문화자료조사집 서촌-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에서 소개한 서촌의 내력을 정리했다.

1. 인왕산 왕기설

  서촌은 오늘날의 사직동, 체부동, 필운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효자동, 신교동, 창성동, 통인동, 통의동, 청운동, 부암동 등에 해당한다. 서촌의 역사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시작된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주산은 백악이다. 백악의 우백호인 서쪽 인왕산은 높고 우람해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는 논의도 있었다.

  차천로(1556~1615)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 무학이 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옛날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을 향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무학이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라고 적었다.

  전설처럼 민중 사이에 오래도록 전해온 인왕산 왕기설은 임진왜란 이후 다시 퍼졌다. 광해군 대에 인왕산 기슭에 경희궁과 인경궁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실제로 이 부근에서 살았던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됐다.

  세종이나 영조의 탄생지도 서촌이다. 인왕산은 경치도 좋고 경복궁에서도 가까운 주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그런데 명승지임에 비해 이름난 정자는 많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임금이 사는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447420일 밤 안평대군(1418~53)이 복사꽃이 우거진 낙원에 다녀오는 꿈을 꾸고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려 바친 것이 일본 덴리대 소장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은 그림이 완성된 지 3년 뒤인 1450년 설날 몽유도원도라는 제첨(題簽)을 쓰고 시를 지었다.

  이듬해 꿈에서 본 무릉도원과 비슷한 풍경을 인왕산 기슭에서 발견해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었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에 당대의 문인 학자들을 초청해 경치를 즐기며 시를 지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며 아뢴 죄목 중 첫 번째가 그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인왕산이 왕기가 서린 곳인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라 왕권 탈취의 의도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 외에도 김종서, 이개,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 당대 최고 문신 21명이 친필로 글을 썼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이들의 운명은 둘로 갈라졌다. 신숙주, 정인지 등은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에 오르고, 안평대군과 김종서는 목숨을 잃었다. 성삼문, 이개, 박팽년 등 사육신은 3년 뒤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다 실패해 역적으로 처형당했다. 부암동에는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어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 터임을 나타내고 있다. 안평대군의 옛 살림집 근처에 있었던 기린교로 추정되는 돌다리가 지금은 철거된 옥인동 옥인아파트 9동 옆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문인화가 겸재 정선(1676~1759)18세기 조선의 독자적인 진경산수화풍을 창출한 인물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웃대(서촌)를 그린 그림은 60대 이후 체득한 완숙한 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라 예술성이 뛰어나다. 인왕산 주봉 전체를 화폭에 옮긴 그림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강희언(1738~84 이전)인왕산도가 있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인 1751(영조 27)에 그린 노년기 역작이다. 사실적인 재현에 기초하면서도 내면의 심상을 투영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가령 백옥색을 띤 인왕산 바위는 검은 먹색으로 반전시켜 장중한 무게감을 줬다. 인왕산 기슭에 폭포를 두 군데 그린 것도 특징이다. 실제로 인왕산에는 멀리서 보일 정도의 폭포는 없다. 청풍계 계곡과 수성동 쪽으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를 원경인 그림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강희언의 인왕산도는 객관적인 시각에 충실한 그림이다. 인왕산 골짜기를 자세히 파악해 가옥과 지형의 특징을 표현했고, 도성의 성벽과 능선도 빠뜨리지 않았다. 강희언은 특이하게도 여느 산수화에서는 여백으로 남겨두는 하늘을 수채화처럼 채색했다. 하늘의 기상을 관측하는 관상감 관원이었던 그는 하늘도 그려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2. 정조대왕 국도팔영

  정조(1752~1800)는 서촌 지역에 자주 행차했다. 사당인 육상궁(증조모), 선희궁(할머니), 연우궁(할머니)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참배를 마치면 선희궁 옆에 있던 세심대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했다. 세심대는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열양세시기“(세심대는) 꽃나무가 많아 봄의 꽃구경이 장관이다. 영조, 정조, 순조, 익종이 여기에 자주 거동하고 한 달 동안 사람들이 구름같이 구경했다고 적혀 있다.

  세심대는 원래 당진현감을 지낸 이정민(1556~1638)의 집터였으나 도성에서 경치 좋기로 유명해 광해군이 세심대를 취하고 대신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정민은 이를 피해 홍주 봉서산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정조는 세손 시절 국도팔영(國都八詠)’을 지었는데, 인왕산에 자주 오르던 때라 주변 명승을 많이 꼽았다. 8곳의 명승 중 필운대, 청풍계, 반송지, 세검정 등 인왕산 자락 서촌의 명승지 네 곳이 포함됐다.

3. 이상의 집, 윤동주의 하숙집

  20세기가 된 뒤에도 서촌은 예술의 중심지였다. 이중섭, 이상범, 박노수 등 당대 최고의 화가와 노천명, 윤동주, 이상 같은 당대 최고의 문인이 이곳에 살았다. 이상(1910~37)3세 되던 1912년 형편이 넉넉하던 백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상은 백부의 집인 통인동 154번지에 23세까지 살았다. 짧았던 생애 대부분을 보낸 곳이지만 통인동이 작품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경성의 모던보이로 유곽이나 카페에 대한 글을 썼던 그에게 전형적인 주택가인 서촌이 작품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집은 백부가 세상을 떠난 1933년 팔린 뒤 헐려 자취가 없어졌다. 그러나 2007년 문화유산 보전 단체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사들여 이상 기념관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윤동주(1917~45)가 서촌으로 이사온 까닭은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식사가 부실해져서다. 그는 졸업반이던 19415월부터 9월까지 누상동 하숙집에 살면서 십자가’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등의 작품을 지었다. 윤동주의 하숙집은 10년 전 헐렸고 그 자리에 3층짜리 다가구주택이 들어서 있다.

4. 서촌의 문화재

  사적 제149호로 지정된 육상궁과 칠궁은 조선조 500여 년간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 7명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고종 19(1882) 불타버린 것을 이듬해 복구했다. 순종 1(1908) 이후 여러 곳에 분산돼 있던 여러 신위를 옮겨와 결국 칠궁이 됐다. 저경궁(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신궁), 대빈궁(숙종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신궁), 연호궁(영조 후궁이며 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 신궁), 선희궁(영조 후궁이며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 신궁), 경우궁(정조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신궁), 덕안궁(고종 후궁이며 영친왕 생모인 순헌황귀비 신궁)이 모셔져 있다.

  등록문화재
93호인 배화여고 생활관은 당초 선교사를 위해 주택으로 지어졌다. 1915년 무렵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맨 아래층이 반지하로 되어 있어 현관으로 들어서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전체적인 외관은 서양식 붉은 벽돌벽과 서양식 기둥을 사용했지만, 한옥의 기와지붕을 올려 서양식과 한국식 건축이 섞여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문화재자료 9호로 지정된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 집터는 필운대(弼雲臺)’라는 바위 글씨로 남아 있다. 배화여자 중 고교 교사 별관 뒤편 높은 암벽의 왼쪽에 세로로 새겨진 글씨다. 이항복의 글씨라고도 하고, 그 후손인 이유원(1814~88)의 글씨라 전하기도 한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로 서산(西山), 즉 인왕산을 뜻한다.

  
그 밖에 동양화가 이상범 가옥(등록문화재 171), 박노수 가옥(문화재자료 1), 홍종문 가옥(서울시 민속자료 29), 해공 신익희 가옥(시도기념물 23) 등 문화재자료가 서촌에 남아 있다. 박노수 가옥의 경우 일제시대 대표적 친일파인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 한국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이 1930년대 후반 설계했다. 조선 말기 한옥 양식과 중국식, 서양식 수법이 섞여 있는 절충식 가옥이다.(대부분의 글은 서촌(서울역사박물관) 자료집에 실린 허경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의 논고 문학작품에 나타난 서촌의 모습에서 발췌·요약했다. 인왕제색도 관련 글은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논고 한양 웃대의 명승 명소와 진경산수화에서 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