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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홍합 한냄비 소주 석잔' 찬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따뜻한 국물... 신혼시절,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는 집을 살짝 나와 포장마차에서 밤 데이트를 즐겼다. "홍합 한냄비, 소주석잔이요" 푸근하게 반겨주던 아주머니는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홍합을 최대한 수북하게 얹어 내밀어 주었다. 늘 빠듯했던 우리 주머니 사정을 읽고 계시듯... 따뜻한 홍합 국물과 소주 석잔을 세상 누구보다도 맛있게 먹었던 남편, 옆에서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던 아내, 그렇게 순수하고 예뻤던 시절이었다. 첫아이 출산을 앞둔 전날 밤, 힘내야 한다고 남편은 아내에게 고기를 사 먹였고, 기저귀를 사들고 돌아오는 길에 만삭의 몸으로도 포장마차를 찾았다. "홍합 한냄비, 소주 석잔이요" 아주머니가 먼저 외치며 반겨 주었다. 순산하라는 격려까지 잊지 않았다. 그날이.. 더보기
가을 정리 제대로 정리도 하지 못한 가을.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는 삼한사온이라는 오랜 기온의 습성을 무시하듯, 일주일이 다하는 시간을 추위로 묶어놓고 있다. 갑자기 기준점을 잃어버린듯, 가을의 끝자락에서 서성이듯 애타던 마음이 그대로 얼어 붙었다. 지금쯤에서, 삶이 내게 주는 의미는 내가 살면서 움직여 온 발자욱들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앞으로의 길은 어떻게 걸어가야 후회가 없는 건지 되돌아봐야 할 시간인데...... 나이가 들고 연륜이 쌓여 가면서, 자꾸 떨어져 나가는 자신감.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고개 위에서, 작고 소박했던 꿈들은 부셔져 가고 있다는 상실감. 그리고 모두가 내 곁을 떠나가고 있다는 외로움...... 가을의 아픈 그림자들은 모두 털어낸다. 보내기 싫었던 형형색색의 아름다움도 추억으로 정리한다. 그.. 더보기
시전행랑 - 종로 조선시대 6개 중앙관청이 있던 광화문 앞의 대로, 주작대로 기능을 담당했던 육조거리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서 황토현(현재, 광화문 사거리) 대로로 오늘날 세종로의 전신을 말한다. 육조거리 시전행랑은 일렬로 쭉 늘어선 상인들의 건물로 걸죽한 삶의 향기와 장인의 정신이 녹아있는 조선당대 상거래가 이루러졌던 곳이다. 시전은 조선시대 지금의 종로를 중심으로 설치된 어용상설 시장으로 시사 라고도 한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종로 거리,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시전행랑을 잠시 살펴 보았다. 이른 시간이라서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시전행랑은 15c, 16c, 17c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넓게 유리판이 덮여 있었다. 그 옛날 상인들의 활기찬 생활 모습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종로 거리에서 추억해야 할 옛 .. 더보기
추억 ~~ 라면 라면, 1963년 어려웠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끼니를 생각하며 일본에서 기술을 들여왔고 그 때의 가격은 10원이었다. 그 후 혼, 분식 장려등에 힘입으며 라면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라면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먹거리인것 같다. 1970년대 초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쯤으로 기억된다. 서민 먹거리로 출발을 했다고 하지만 우리집은 라면을 쌓아놓고 먹을만한 여력이 없었던것 같다. 찬바람이 불던 어느 가을날, 추위에 떨며 학교에서 돌아와 라면 하나를 삶아 먹겠다고 어머니를 졸랐다. 어렵게 라면 하나를 사 와서 직접 끓이기 시작했다. 거의 다 타고 있었던 연탄 아궁이에 냄비를 올려놓고 콧노래를 불러가며 라면이 끓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작고 둥그런 알루미늄 상에다 라면 냄비를 올려놓고 방.. 더보기
추억 ~~ 스케이트 기차가 머물렀다 지나간 플랫폼 줄 지어 나오는 긴 행렬들 속에서 사촌 언니 결혼식을 다녀오는 부모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살 아래인 남동생의 작은 어깨에 매고있던 주머니를 보는 순간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스케이트, 1970년대 초반에 붐이 일기 시작했고 당시에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의 소망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박봉에 4남매를 어렵게 키우던 어머니는 오랜 나의 졸림에도 쉽게 허락을 하지 않았다. 마침 서울 결혼식에 가게 된 부모님, 양복과 코트 주머니 마다 '스케이트 꼭 사 주세요'란 메모를 접어서 넣어 두었다. 꿈은 이루어 진다고 아마도 부모님은 작은 딸의 간절함에 손을 들었던가 보다. 그렇게 오빠, 언니를 제치고 내가 우리집에서 가장 빨리 스케이트를 가지.. 더보기
추억 ~~ 화투 화투 놀이를 시작했다. 육백, 두사람이 육백점을 먼저 만들면 이기는 화투 놀이였다. 아버지는 가끔 장난스럽게 화투장 한 두장을 속였고, 어머니께 발각이 되면 심한 채근을 당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4남매는 나란히 엎드려 화투 놀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불 하나를 같이 덮으니 셋째인 나는 늘 중간에 누웠다. 다섯살 위인 언니는 자주 움직이는 나에게 꼼짝말고 누워 있기를 명했다. 그럴수록 나는 왜 그렇게도 간지럽고 움직이고 싶었던지, 꾹 참으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얼른 한꺼번에 여기저기를 긁고 뒤척였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만 있으라고 계속 핀잔을 듣곤 했었다. 육백나기가 끝나면 승패에 관계없이 어머니는 누런 엿 한판을 사 왔다. 그리고 식칼을 얹고 망치로 엿판을 툭툭쳐서 작은 사각형으로.. 더보기
추억 ~~ 이름 가족관계 증명서 부: 김연봉, 모: 김봉연 부, 모의 이름을 보면 잠시 웃음과 함께 생각에 잠기게 된다. 학창시절 부모님의 거꾸로 된 이름 자 때문에, 이름을 재확인하는 선생님의 호출을 자주 받곤 했었다. 물론 한자는 다르게 쓰였지만, 아주 어렸을 때는 창피하다는 생각에 고민 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이런 이름을 갖게된 데는 작은 사연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혼인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동네 면사무소에 불이 났다. 덕분에 호적 서류들이 불타 버렸다. 당시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바쁜 업무로 서류를 정리해야 할 마지막 날에 겨우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어머니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전화도 없었던 시절이라 생각을 하다가 결국 당신의 이름 자를 거꾸로 하고, 한자만 바꿔서 서류 정리를 하게 .. 더보기
이슬이를 사랑하는 남편 이슬이를 사랑하는 남편. 여행길에서 항상 이슬이와 함께 하고싶어 한다. 분위기에 따라서 여러종류의 술을 마시겠지만, 남편은 기차 여행을 할 때 이슬이, 오징어 구이와 함께 하는것을 좋아 하는것 같다. 어렵고 많이 부족하기만 했던 어린시절의 추억이 한몫 하는것 같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던 젊은 시절, 남편은 하루종일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이슬이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었다. 나에게 전화로 미리 준비해 줄것을 부탁하곤 했었는데, 그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이슬이를 부르던 우리들만의 은어가 있었다. "알지?" 어느새 먼 기억속에 머물러있는 그 말, 가끔 추억처럼 되새기며 커다란 웃음을 만들어 낸다. 정말 오랜시간 동안, 나 만큼이나 남편과 동거동락을 해 왔던 이슬이인것 같다. 즐거울 때도 괴롭고 어려울 때.. 더보기
씨앗호떡 창원에서 일정을 마치고 늦은시간 도착한 부산. 짧은 여정에 아이들에 이끌려 첫번째로 갔었던 부산 피프거리. 부산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거리였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곳은 서울의 종로나 명동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유난히 길게 줄을 서있는 포장마차 두곳, 무한도전과 승기 호떡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우리는 무한도전쪽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 씨앗호떡을 맛보게 되었다. 호떡안에 각종 씨앗들을 넣는게 특이했는데, 영양도 맛도 좋아 기다려서 먹을만 하다는 호평이었다. 오랜만에 뜨거운 김을 호호 불며, 씨앗호떡을 먹으며 부산 남포동 거리를 걸었다. 잊고있었던 옛 추억하나를 만난것처럼 활짝, 즐거움이 함께 했다~~^^* 더보기
꽈리 남양주시 금곡에 살고있는 사촌 언니네 집, 마당 구석에서 붉은 꽈리를 발견했다. 어렸을때 동그랗고 빨간 열매를 많이많이 주무르다 옷핀으로 끝을 쩔러서 안에 들어있던 씨를 모두 빼내고, 입에 넣어 공기를 불어넣고 이로 지그시 누르면 소리가 나는 재미있는 놀이감이었다. 난 꽈리 만들기가 서툴러서 망치기 일쑤였었다. 문득 뛰어나게 잘 만들어서 폼나게 불고 다니던 친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추억에 젖게 만드는 꽈리, 우리 아이들은 꽈리 자체를 이해나 하고 있을련지... 스마트 폰으로 모든걸 해결하는 아이들, 엄청난 문화의 차이를 겪으면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더보기